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예고한 대규모 주주환원 계획을 기술 인프라 투자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삼성전자는 2026년 약 90조~11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 중 30조원의 현금배당을 우선 추진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과 함께 2025~2027년 누적 잉여현금흐름(FCF)의 50% 이상을 주주에게 환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미래학자이자 스타벤처스 대표이사인 문지은 박사는 두 회사의 주주환원 최대 합산 규모를 가상의 ‘미래기축산업 전환계정’으로 재구성해, 이를 AI컴퓨팅·에너지인프라·로봇·우주통신 등 미래 산업 인프라에 전략투자할 경우의 산업지도를 제시했다.
HBM·파운드리부터 CPO·인터커넥트까지, AI컴퓨팅 밸류체인
문 박사가 제시한 가상 배분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AI컴퓨팅 분야로, HBM·파운드리·첨단 패키징·CPO(공동패키지광학)·인터커넥트 등을 포괄해 45조원이 배정됐다. HBM은 AI 시대의 핵심 고대역폭 메모리로, SK하이닉스가 주요 공급자로 꼽힌다. 그 다음으로는 AI 데이터센터를 뒷받침하는 전력·송배전·저장·냉각·전력반도체 등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 30조원이 책정됐다.
Physical AI로 분류되는 휴머노이드·산업로봇·자율공장·자율주행·엣지AI 분야에는 25조원이, 저궤도위성·지상국·지구관측·우주물류 등 우주·통신 인프라 분야에는 20조원이 배분됐다. 나머지 30조원은 AI 융합산업 및 해외 지분·인재확보 등에 배정되는 구조다. 문 박사는 이 배분안이 실제 기업의 투자계획이 아니라 전략적 가정에 따른 시나리오임을 분명히 했다.
부품 공급자에서 밸류체인 권리자로
문 박사는 전략투자가 단순한 지분 보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짚었다. 장기공급계약, 사용량 연동 수익, 우선사용권, 기술표준 참여권 등 실질적인 ‘권리’를 확보해야 미래 산업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AI반도체 생산기업을 넘어 AI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는 기업으로, SK하이닉스는 HBM 판매기업에서 AI 공장의 수익권에 참여하는 기업으로 각각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배경에는 미래 산업의 경쟁력이 세계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인프라·기술표준·장기계약·데이터 권리를 소유하는 데서 나온다는 판단이 있다. 한국이 이 길목을 확보하지 못하면 부품 제조에만 머물고, 부가가치는 다른 기업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다. 문 박사는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 지형과 테슬라의 글로벌 지상 네트워크를 사례로 들어, 자본과 에너지, 데이터센터, 국가 단위 인프라 투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국내 산업단지는 심장, 해외 거점은 혈관
문 박사는 주주환원과 미래투자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현재 주주가치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미래 현금흐름 자산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는 것이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주식 수가 줄어 주당 지표를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기술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 새로운 성장축을 확보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나누어 가질 미래 이익의 크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이를 위해 그는 국내 산업단지를 심장으로, 해외 전략거점을 혈관으로 삼는 ‘Korea Anchor + Global Nodes’ 전략을 제안했다.
다만 그는 계열사 지원으로 변질되는 자본출자 순환과 미래산업 재투자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짚었다. 대규모 전략투자에 따르는 실패 가능성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투자위원회를 두고 기술·시장의 이정표에 따라 자금을 분할 집행하며, 목표 수익률과 투자 중단 조건을 사전에 정하고 외부 가치평가와 정기적인 성과 공개를 병행하는 구조를 제시했다. 그래야 미래 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와 주주가치 보호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소버린 AI 역시 국산 여부가 아니라 기술·인프라 사용권을 확보하고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2035년을 향한 국가 기술대차대조표
문 박사는 AI컴퓨팅, 전력, 공급계약, 로봇 배치, 위성데이터 등을 지속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국가 기술대차대조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지구에서 달과 화성으로 이어지는 우주 수송망 개념도처럼, 지상의 에너지·모빌리티 역량과 우주 물류 인프라가 연결되면서 미래 산업의 영역이 지구 밖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문 박사가 제시한 150조원 배분 시나리오는 실제 기업의 투자 계획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적 가정이다. 그럼에도 이 시나리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제조 역량을 넘어 AI컴퓨팅과 에너지, 로봇, 우주통신이라는 밸류체인 전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참고점이 된다. 부품 제조에 머무를지, 인프라와 표준을 소유하는 밸류체인 상위 권리자로 이동할지가 이 시나리오가 던지는 질문이다.